1. 머리말
2. 계족산성의 지정학적 위치
3. 역사적 고찰
4. 고고학적 고찰
5. 발굴조사 결과의 문제점
6. 맺음말
요약
역사적으로 볼 때 대전지역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우술군(雨述郡)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비풍군(比豊郡), 고려시대에 회덕현(懷德縣)으로 개칭되어 조선시대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회덕현은 대체적으로 지금의 대덕구 전역과 동구 일원이었고, 그 외에 서구 일부(삼천동) 및 유성구 일부(전민동)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삼국시대에 백제의 동쪽 변방인 우술군에 속했던 대전지방이 연방의 요충지로 부각된 것은 백제가 외압에 의하여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긴 이후부터라고 하겠다. 웅진 천도이후 우술군이 신라에서의 최단거리상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책이 강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백제 멸망이후 백제부흥군이 웅진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그 통로상에 있는 대전지방의 요충지에 군사력을 집중시켜, 신라의 군량운송로로 경주를 출발하여 보은을 거쳐 옥천-대전-공주에 이르는 소위 ‘웅진도(熊津道)’를 차단하려 하였던 것에서 나타나며, 이러한 사실은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긴 성왕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관산성(管山城 : 現 沃川)을 공격하다 전사한 사실과, 신라 태종무열왕이 660년 백제 침공시에는 상주 금돌성에 머물러 있었고, 침공직후에는 보은 삼년산성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대전지역은 삼국시대에 신라-백제간의 접경지로서 계족산-식장산을 연결하는 산맥이 백제군의 최전방 구실을 하였으며 이와 관련되어 축조된 20여개소의 산성유적이 포치되어 있는 것이다. 실로 계족산에서 식장산에 이르는 불과 16㎞정도 거리의 산능선상에는 계족산성을 비롯하여 성치산성, 노고성, 마산동산성, 견두성, 이현동산성, 장동산성, 질현성, 고봉산성, 백골산성, 능성, 갈현성, 삼정동산성 등 13개소의 산성이 분포되어 있으며, 계족산성과 질현성 사이에는 둘레 25m에서 150m까지의 크고 작은 성보 6개소가 배치되어 있고, 삼정동산성에 둘레 50m정도의 보(堡)가 1개소 축조되어 있다. 이들 일연의 산성들은 서로 우익(右翼)이 되고 좌익(左翼)이 되며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들 사이에는 아군과 적군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은 수백㎞에 달하지만 신라가 국경선의 일지점을 택하여 이와 같이 방어형의 군사시설을 구축한 예는 없다. 신라왕경 경주는 국경지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위치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수비체제는 무의미하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시대에 있어서 우술지방은 공주로부터 불과 38㎞정도의 근거리에 위치하였으며 만약 이 지역이 적군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면 백제의 명맥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를 면치 못하게 된다. 계족산-식장산 방어선은 신탄진에서 옥천에 이르는 금강과 그 도하점을 방어하기 위하여 백제가 축조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갑천과 금강사이에 있는 이 좁은 지역을 방위하기 위하여 신라가 이 곳에 20여개의 성보를 구축하였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분석하여 볼 때 계족산성을 신라성으로 보는 3가지 사항 중 첫 번째 주장하는 기단보축은 신라의 전유물이 아니라 고구려 산성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백제와 신라가 공히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즉 대성산성 소문봉 부근의 성벽, 태자성, 임진강 북안의 호로고루(葫蘆古壘), 아차산성(阿且山城)과 포천 반월산상에서 기단보축이 확인되었다. 이 기단보축의 시원에 대하여서는 신라의 소축으로 알려져 왔으나, 대성산성의 경우 축조연대를 4세기말, 5세기초를 넘지 않기 때문에 신라보다 앞선 축조기법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기단보축은 고구려에서 발달하여 백제와 신라에서 공히 채택된 기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