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고대 일본의 공방
Ⅲ. 칙원사의 전반적인 양상
Ⅳ. 사찰 조영 집단으로서의 조사사
Ⅴ. 마치며
요약
한국과 일본의 고대 사회에 있어 불교의 수용이란 신문화이면서 당시의 선진 문명이 파급됨은 물론이고 ‘불교’라는 하나의 사상 안에서 생겨난 최첨단 기술과 지식을 체득할 수 있다. 불교 ‘사찰’에서는 첨단 기술을 가지고 있던 장인이 사찰 건조를 담당하고, 금속류 및 유리 등을 재료로 한 공예-특히 금속공예 공방을 비롯하여, 탑을 만들 때의 석조장인 공방도 존재했다.
본논문의 목적은 이러한 고대 일본 공방체제에 대해 알아보고 사찰 공방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찰을 지을 때의 중심 관료와 장인으로 활동하던 조직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에 앞서 아스카이케 공방 유적과 화사 조직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천황’이라는 권력자의 후원을 받아 만들어진 칙원사에 집중해 보았는데, 이는 후에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되는 관사로의 변화와 함께 조영 집단의 성격 또한 변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격이 바뀌어 감에도 칙원사가 가지는 천황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조영을 위해 고용되었던 장인이나 기술자들이 당시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술 또한 최첨단이었다는 점은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 싶다. 최초의 칙원사였던 쿠다라 다이지와 카와라데라, 그 뒤를 잇는 야쿠시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造百濟大寺司, 造高市大寺司, 造藥師寺司등의 임관 양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 중, 후자인 조약사사사의 단계가 되면 텐무9년(680)의 칙어에 의해 사찰이 발원되고 조영이 시작됨과 동시에 칙원사가 아닌 관사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어 전자의 예들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몇 가지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첫째로 초기 칙원사에서는 궁궐을 만들던 집단과 함께 사찰을 짓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 둘째로 천황에게 명을 받고 천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궁실이나 사찰을 만든다는 면에서 천황가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이는 조사사를 임명하는데 있어 보통 때보다 한 단계 높은 직위의 관리를 임명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으로, 행정 처리상의 수월함을 근거로 들었다.
삼국과 깊은 관련을 가진 고대 일본의 공방체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실정이다. 하지만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의 예시를 통해서 문헌 사료나 현존 작품이 매우 드문 우리나라의 고대 사찰이나 공방체제를 연구 혹은 복원하는데 한층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