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적은 산능선상에 土壙을 파고 骨藏器를 直立․安置한 百濟末技의 火葬墓이다. 이곳에서는 모두 2기의 火葬墓가 확인되었는데 단편적이나마 매장구조가 밝혀진 1號墓로 보아 얕은 토광내에 骨藏器로 壺나 甕에 뚜껑을 덮어 안치하는 간단한 형식이다. 骨藏器외에 토광 상부의 石蓋나 木蓋, 토광내의 바닥시설이나 벽 시설은 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骨藏器로 사용된 토기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형태의 火葬墓는 충청남도 扶餘지방에서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 유적의 火葬墓도 입지와 매장방식, 骨藏器의 형태 등에서 扶餘지방에서 확인되는 火葬墓와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骨藏器의 형태에서 扶餘지방의 火葬墓는 보주형이나 단추형과 같은 꼭지를 가진 蓋와 직립된 구연을 가진 直口平底壺가 결합하고 있기 때문에 본 유적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들 骨藏器는 灰色硬質의 전문적인 火葬容器 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오히려 본 유적의 火葬墓는 骨藏器의 형태상으로 본다면 扶餘 中井里 1․2號墳처럼 有蓋盌을 上下로 중첩시키거나 중앙에 큰 壺를 놓고 주위에 작은 有蓋盌을 돌린 형식의 骨藏器와 연결된다. 이와 같은 차이가 지역적인 차이인지 아니면 시기적인 차이인지 아직까지는 이 지역에서 관련된 자료가 부족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이상에서 본 유적의 火葬墓는 1․2號墓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2號墓의 경우는 把手附甕의 연대를 감안한다면 보다 연대가 올라갈 가능성이 있으나 입지와 매장구조가 같기 때문에 실제로 시기차이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 유적은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고고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첫째는 지금까지 百濟의 火葬墓가 대체로 百濟가 泗沘로 遷都한 이후 扶餘지방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해당하는 전북지역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佛敎文化의 파급과 관련하여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둘째는 지금까지 전북지역에서 백제의 墓制로 확인된 甕棺墓, 石室墳과 함께 火葬墓가 새로운 墓制로 추가됨으로써 百濟末技 이 지역 墓制의 다양성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