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복암리1호분의 墓制的 특성
III. 백제의 綠釉器 제작과 綠釉托盞
IV. 綠釉托盞의 명문 검토
V. 鷹隼과 나주 지역의 정치세력
VI. 맺음말
요약
복암리1호분은 6세기 후반대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여 능산리 東下塚과 같은 단면 4각형 석실로서 그에 후행하여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이 고분의 연도에서 綠釉托盞이라는 독특한 형식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는 웅진기 이래의 금속기를 토기로 번안한 특색 있는 유물로 무령왕릉 출토의 銅托銀盞과 그 모티프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녹유탁잔의 잔받침 하부에는 두 글자의 명문이 있다. 이 명문은 隼으로 판단되는 데, 은 鷹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글자로서 매를 뜻하며, 隼은 새매를 뜻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는 백제의 별칭으로 알려진 鷹準, 鷹遊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鷹隼은 매와 새매, 즉 매의 총칭으로 사용되는 반면, 용감한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으며, 과거에는 흉포한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단어가 본래의 형태로 사용되지 않았던 이유는 곧 이 ‘흉포한 사람’이라는 뜻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南蠻 등과 같은 경멸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며, 후대의 경우지만 鷹隼旗의 형태로 사용될 때에는 붉은 색이라는 이미지로 南方을 뜻하기도 했다. 결국 여기에는 백제 중앙과 구별되는 특정한 지역, 혹은 집단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鷹隼이라는 단어는 외부 집단이 백제를 지칭하는 별칭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백제의 별칭으로 그 직접적인 성장 토대가 된 馬韓이나 聖王 이후로 사용했던 국호인 南夫餘 등이 사용되지 않고 鷹隼의 다른 형태인 鷹準이나 鷹遊가 사용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결국 이는 鷹隼으로 지칭되는 집단이 백제 사회 내에서 지속해온 정치․사회․문화적 영향력이 상당하였던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한 시기에 돌발적으로 등장한 명칭이 아니라 백제 사회의 내적 토대 속에 켜켜이 적층되어 쌓여온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백제 문화의 기저에 존재하는 상반되는 문화적, 정치적 계통들 중 역사상 가장 늦은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沸流 전승이나 馬韓에 대한 기억들보다는 새로운 것이며, 국가의 정치적 의도에서 정책적으로 수행된 南夫餘의 강조와는 달리 상당한 생명력을 지녔던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