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전에 공주에서 무녕왕릉이 조사되고 그 유물이 보고공개됨에 따라 각종각양다량의 호화찬란하고 완전한 형태의 유물과 연대고증에 절대적인 유물이 출토되므로 인하여 백제의 장신구의 계보와 백제인들의 사상·종교·문화·예술성을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각종유물의 양과 자료가 극소하여 유물의 원류나 형식분류는 할 수 없으므로 다만 백제유적에서 출토된 장신구류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 유물의 용도를 약기하였다. 백제의 관모에 관하여 확실하게 그 유입, 발전, 전파의 과정을 살피기는 어려우나, 신라, 가야와는 그 형태가 좀 다르고 고구려의 금동관과 유사함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나주 반남면 신촌리 제9호분 을관 출토의 백제금동관과 평양 부근 고분 출토 투각초화문금동관과는 초화문의 투각이라는 문양기법이 상통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서 기록에도 “其飮食衣服與高麗略同”이나 “其冠兩厢加翅”의 문구도 백제는 고구려의 복제관모와 련관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금제의 발삽식구로서의 뒤꽂이는 무녕왕릉의 왕의 두부위에서 발견되었고 은잠은 여자의 결발구겸두식구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백제의 이식이나 경식(목걸이)에 관한 고기록은 찾아 볼 수 없으나 마한인들의 이식경식에 대해서는 몇 고문헌에 소개되고 있다. 환(고리) 1개로 된 소환식이식과 이환부중간식수하식의 삼부분으로 형성된 화려하고 발달된 이식이 있으며, 그 재료도 금제, 금동제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주조단조기술이나 조금, 도금기술도 매우 정교하고 우아하다고 할 수 있다. 백제의 경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세금봉절을 원환으로 연결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각종각양의 옥류를 연결시킨 것이다. 백제의 팔찌에도 금, 은, 금동제가 있는데, 손목에 끼울 수 있게 둥글게 만들었으나 그 양끝을 붙이지 않아 크고 작게 줄였다 늘였다하게 된 것도 있으며, 팔찌 외면을 거치문룡문으로 한것 또는 구성이 세금봉을 쇄상으로 연결한 것도 있다.
백제인들은 지환 패용을 많이 하지 않아서인지 호화찬란한 각양의 유물이 수천점부장된 무녕왕릉에서 조차도 지환은 출토되지 않았다. 대금구는 포등의 대(띠)의 표면에 부착시켜 화려하게 장식하는 띠의 부속물로서 과판교구(띠고리) 선금구(띠끝)로 나누어지는데 백제유적에서 알려진 대금구도 그 수가 극히 적어 몇 례만이 알려지고 있다. 식리는 부장품으로서 일상의 장신용구라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유물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