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은 先史時代부터 韓國文化를 받아 들였다. 支石墓․石棺墓․甕棺墓 등의 原始墳墓制를 비롯하여 竪穴式住居址와 土器․石器․靑銅器 등은 韓國것과 日本것이 그 양식상 상통되는 점이 많다. 일찍이 韓國先史文化가 東流하고 彼地 日本에 韓國文化가 移植成長하기 시작한 것이다. 뒤이어서 古墳文化에 있어서도 韓日間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日本의 竪穴式石室墳과 橫穴式石室墳의 築造樣式은 마치 韓國의 類例와 흡사하고 또한 日本의 裝飾古墳의 裝飾壁書는 伽耶地域과 新羅地域의 岩刻畵의 影響이며 日本의 高松塚의 壁書古墳에 연결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뿐만 아니라 日本의 古墳 副葬品으로서 裝身具․馬具․武具․農工具에 이르기까지 韓國의 古墳 副葬品 그 樣式은 닮았다. 그리고 土器生産에 있어서도 日本의 土師品와 須惠品는 韓國의 軟質赤色土器와 陶質土器의 生産技法의 영향을 받았다. 三世紀後半부터는 우리 韓國과 日本과 사이에 交通이 열리어 韓國文化가 크게 東流하였다. 특히 백제와의 교섭이 빈번하였으니 곧 漢文字․儒學․佛敎 등이 東渡하고 또 建築․周刻․繒畵․工藝 등과 이밖에 각종 학술이 전래되어 六世紀頃에는 彼地 日本에 飛鳥文化를 形成하기에 이르렀다. 日本의 飛鳥文化가 形成되기 以前에 百濟는 王仁博士가 千字文과 論語를 가지고 渡倭하여 彼地의 文運을 융성시키고 마침내 飛鳥文化를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王仁博士의 渡倭 事實이 日本側 에는 記錄이 있으나 우리 韓國側의 文獻에는 보이지 않고 또 이 王仁 遺蹟과 王仁의 後裔가 日本에는 남아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王仁의 遺蹟과 王仁系 氏族 등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全羅南道 靈巖郡 月出里 아래에 王仁 遺蹟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靈巖 王仁 遺蹟에 대하여 學界의 관심이 집중된 바 있어서 이에 대한 기사가 新聞과 雜志 등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또 王仁 博士 顯彰協會가 發足되어서 이제까지 숨어 있었던 王仁 遺蹟이 빛을 보이게 되었다. (필자 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