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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미술

유물 · 유적을 통해 본 백제건국설화(百濟建國說話)

  • 분류 고고·미술 > 기타
  • 권호수 제24권 제3호
  • 저자 이인철
  • 발행일 2001년 9월
  • 게재지 정신문화연구
  • 발행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목차

I. 머리말
II. 백제건국 전후기의 유물과 유적
III. 백제건국설화와 왕실계보
IV. 고구려계통 이주민 통합과 백제건국설화
V. 맺음말

요약

백제를 건국한 사람들은 기원전 1세기경에 풍납토성을 축조하고 풍납동식토기와 타날문토기 그리고 뱀머리 모양 강철제 화살촉을 사용하며 前漢의 오수전을 교역의 수단으로 이용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김해식 토기를 사용하고 무기단적석총에 묻힌 고구려계통의 사람들보다 이른 시기에 한강유역에 도달해 백제를 세웠다. 토광목관묘를 그들의 무덤 문화로 간직한 것으로 보아 백제건국세력은 기원전 1세기경에 부여에서 남하한 사람들이었다. 한강유역의 적석총에 앞서 축조된 토광묘가 백제건국세력의 묘제이고 그 묘제가 부여계열이므로, 백제왕실이 토광묘관묘계통의 부여계에서 적석총계통의 고구려계로 교체되었을 가능성을 백제건국설화와 그 동안 제기된 백제왕실교체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백제건국설화를 통해서는 백제왕실이 교체되었을 가능성을 점칠 수도 있었지만 왕실계보를 통해서는 왕실이 교체되었다는 주장에 찬성하기 어려웠다. 토광목곽묘에서 적석총으로의 묘제 변화는 단순히 무덤 문화의 변화였을 뿐 정치적인 변화와는 상관관계가 없었다. 백제의 건국설화는 부여와 고구려 건국설화의 연장선상에 만들어진 설화였다. 백제의 건국설화에 해부루에 관련된 내용이 들어가게 된 시기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동부여 관련부분이 들어간 5세기 중반 이후였다. 백제왕실이 고구려보다는 부여와의 관련성을 강조할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장수왕의 한성침공이 단행된 5세기 후반 이후 계속되는 남진정책으로 백제왕실이 고구려와 같은 주몽의 후손임을 내세우는 것이 용납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백제성왕이 국호를 아예 南扶餘라고 고친 것도 그러한 정치상황이 극단에 처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가 다시 손을 잡고 나제동맹에 대항해야 할 시점에 가서는 온조 중심 설화가 다시 백제를 대표하는 정식건국설화로 채택되었다. 『三國史記』 백제본기 본문에 온조 중심의 설화를 기록해 놓은 것은 이 같은 상황전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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