扶餘 陵山里寺址 유적은 능산리 고분군으로부터 불과 10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왕릉을 수호하고 그곳에 묻힌 백제왕들의 追福을 기원하는 陵寺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특히 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이 출토되어 사원의 목탑이 567년에 건조되기 시작하였으며, 聖王의 딸이자 위덕왕의 누이인 공주가 목탑 건립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음이 확인되자,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었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6・7차 발굴조사 과정에서는 서배수로 인접구역에 노출된 V자형 남북방향 溝(초기 배수로)의 내부와 제5배수시설에서 20여 점의 백제 목간이 출토되면서 능산리 유적의 성격에 대한 논의도 한층 심화되었다. 목간들이 출토된 장소가 층위상 서배수로 아래로 흘러가는 수로이며, 능산리 사원보다 앞선 시기의 유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567년 목탑 건립 이전 유적의 성격에 관심이 몰렸다.
먼저 목간의 사용 연대를 천도 이전인 527년에서 538년 무렵까지로 보고 사비도성의 동나성 축조에 관련된 장소였다고 파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와 달리 해당 유적에서 발견된 목간들이 사비도성이 성립한 538년 이후부터 능사가 건립되는 567년 이전까지 都城의 사방 경계지점에서 열렸던 국가의례나 羅城의 禁衛에 관련된 시설에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후 목간의 출토 정황에 대한 세밀한 분석에 기반한 연구를 통해서 목간들을 시기에 따라 세 부류로 구분하고, 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들은 554년 성왕의 죽음으로부터 567년 창왕명석조사리감 매입 사이에 사용되었으며 성왕의 추복 시설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나왔다.
다만, 능산리사지 유적의 성격을 聖王의 추복과 연결짓기에는 아직 증거가 부족해 보인다. ‘亡王子’ 에 대한 추복을 명시하고 있는 왕흥사지 사리기의 경우와 달리 창왕명석조사리감에서는 “백제 창왕 13년인 정해년(567)에 妹兄公主가 사리를 공양하였음”을 밝히고 있을 뿐, 先王을 위한다는 목적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초기시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간들의 내용 또한 성왕에 대한 제사와 관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목간의 내용 및 함께 출토된 유물의 성격을 감안할 때, 능산리사지 유적의 초기시설은 경계 제사의 祭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