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많은 문화유산 및 문헌이 破損, 湮沒되었으므로 삼국 말엽까지 분명히 신라보다는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백제문화에 대하여 그 본래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최근 공주나 부여지구에서 발견된 백제문화유적의 고고학적 성과는 이와 같은 망각된 백제문화의 본질에 지극히 적은 분야이나마 접근을 시도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중국의 산동반도, 요동반도 및 한반도를 이은 환황해문화권은 소위 고대 동이족이 介在된 한중동일문화권으로 인정되어 왔으며 이와 같은 환황해문화권의 교역로인 고대 한중해상교통로가 일찍부터 백제가 중국과 직접 통교해 왔던 문화전파통로가 되었다. 더욱이 백제는 삼국시대 말 한동안은 고구려와 우호관계에 있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삼국초부터 시종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육로상의 문화전파는 불가했던 것으로 보아진다. 따라서 백제가 한성시기 말엽 북조의 북위와 통교가 트인 후 웅진시대까지 사절이 교환되었으며, 남조의 육조문화와 더불어 북방 기마민족에 바탕을 둔 胡風을 가미한 북조문화가 백제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이와 같은 일환으로 중원정통문화인 삼족토기와 더불어 胡服에 원류를 두고 있는 籠冠이 백제에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중국의 仰韶, 殷代부터 土偶인 陶俑은 死者의 봉사자로 무덤을 지켜왔고 진시황제의 병마도용이나 일본의 埴輪人形 등은 당시의 彫塑藝術과 사회풍속사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삼국 중 신라에서는 기마인물상과 고배 항아리 등에 부착한 장식용 토우가 있으나 고구려에서는 주로 고분벽화에 옛 모습이 보존되고 있다. 이에 비해 금번 정림사지 발견의 백제도용이 비록 대부분이 파손상태에 있으나 복식을 비롯한 풍속사연구에 적지않은 의의를 간직하고 있다.
관모란 內冠格인 幘巾과 外冠이 결합하여 성립된 것이며, 外冠은 幘의 後半 頂部의 융기한 모습의 耳類가 발전 변형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耳類型 外冠 형태는 漢代 이후 文吏의 경우 介狀(貝殼을 열어 논 형태)인 長耳이고, 武官의 경우 短耳였던 것이 東晋 이후 圓耳로 변형되고 다시 平上 正方 형태의 方山冠에서와 같이 方耳형태로 발전하였다.
籠冠의 稱이 처음 보이기는 晋書 輿服志 武冠條이며 무관을 別稱 武弁, 大冠, 籠冠이라 하였다는데 이와 같은 武冠인 일명 籠冠은 전국시대 북방 기마족의 袴褶과 더불어 수용한 惠文冠에서 유래된 것이고, 漢代이후 주로 文官의 通服으로 알려진 進賢冠(梁冠)에 해당되는 武官 通用의 冠帽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일명 농관인 武冠은 籠巾과 같이 金璫, 貂, 蟬을 冠飾으로 하여 帝王의 近臣에 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幘巾인 內冠에 첨부 결합된 方正, 平上, 圓頂形의 外冠은 고구려 안악 3호분인 미천왕릉 벽화의 頭光背形 羅冠처럼 또한 중국의 籠巾처럼 紗類(비단)網狀으로 되어 있다. 북위시대 女官이 사용하였다는 紗類質 바탕의 編巾은 幘巾인 內冠에 삽입한 外冠의 형태에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백제 정림사지 출토 농관과 동일한 관모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정림사지 출토 하반신 파편 도용의 복식은 역시 북위 編巾(籠冠)着用立像의 女官服飾과 합치된다. 따라서 이 하반신 도용은 百濟籠冠首部와 연결되었던 하반신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백제농관인물상은 백제시대 농관을 쓴 女官으로 추정할 수 있다.
百濟籠冠首部에 표현된 三道의 모습은 같은 정림사지 출토의 佛頭나 雙髻女人首部에서도 보이므로 사비시대 불교신앙의 片貌를 살피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1949년 이후 중국대륙에서 발견된 籠冠陶俑은 唐代 樂人으로 판명되었고, 이와 같은 男騎樂人이 쓰고 있는 농관은 북위의 女官이 쓰고 있는 編巾처럼 凹字顚倒插入型으로 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정림사지 발견 백제의 농관에는 중국 재래의 籠巾이나 고구려 羅冠類처럼 平上, 平巾, 方正形의 佛像頭光背型처럼 內冠格인 幘巾을 뒷받침하고 있는 형태의 또 하나의 농관이 있다.
결국 백제의 농관은 북위시대 編巾型인 농관의 영향으로 하나는 凹字顚倒插入型籠冠과 또 하나는 佛像頭光背型籠冠이 있었는데 이는 女官을 비롯한 백제관인사회에서 널리 通服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