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강경판>등 필자가 지금까지 직접 분석한 유물의 분석자료와 문헌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은제도금유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1) <금강경판>은 은제금도금 유물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증거로는 은과 금의 이중구조에서 나타나는 AgKα와 AgLα의 무게 백분율 값(wt%)에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특징을 들 수 있다. 그리고 Hg가 검출되는 것으로 보아 아말감기법이 사용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사실은 소지와 도금층을 모두 조사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 은제도금 불상의 분석으로 더욱 명확하게 입증할 수 있었다. 2) <금강경판>에 대하여 간과해서는 안 될 제작기법 상의 특징은 은을 소지로 사용한 점이다. 은의 우수한 전성과 연성을 살려서 양각된 명문을 얻을 수 있었고, 또한 금에 비하여 약 1/2 정도의 비중을 갖고 있기 때문에 19장이나 되는 경판이라도 명문이 뭉개지지 않고, 겹쳐 보관 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처럼 보이기 위하여 금도금한 점 등이다. 3) 우리나라에서 실제 유물에 은제금도금 기법이 사용된 예는 삼국시대부터 확인되었으며, 이후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삼국시대의 경우는 은에 부분도금하여 미적인 효과를 내기 위하여 은제금도금기법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은제금도금 유물의 종류가 더욱 다양해지는 양상을 보였는데, 사리장엄구를 비롯하여 <평탈경>표면의 동식물 문야와 같이 장식적인 목적에도 은제 금도금기법이 이용되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유물에 대한 조사가 수행되어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통일신라 은제도금 유물의 도금층은 비교적 얇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입사, 타출공예 등과 함께 은제도금기법이 널리 유행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사리장엄구는 물론 일상용구에서도 은제금도금기법이 적용된 예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반지, 떨잠 등 장신구에 부분도금 하는 기법이 널리 유행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소수이나 은제도금 불상 등 불교 관련 유물에서도 은제금도금 기법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고려시대 이후에 전통이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4) 은제금도금 유물을 제작한 목적에 대하여 대략 2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우선 은이 갖고 있는 높은 전성과 연성을 이용하여 용도에 적합한 기물을 제작하기 위한 것이다. 즉, 익산왕궁리 오층석탑 발견 <금강경판>의 양각된 글자나 타출공예품 등을 쉽게 제작하기 위한 경우를 들 수 있다. 또 다른 목적으로는 미적인 효과를 얻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은에 부분적으로 금도금하는 경우는 금색과 은색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즐겨 사용했던 기술로 여겨진다. (필자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