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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환경

삼국쟁패기 아단성의 위치와 영유권(三國爭覇期 阿旦城의 위치와 영유권)

  • 분류 지리·환경 >
  • 권호수 제5집
  • 저자 김영관
  • 발행일 1998년 6월
  • 게재지 고구려발해연구
  • 발행처 고구려발해학회

목차

Ⅰ. 머리말Ⅱ. 阿旦城에 대한 기록Ⅲ. 阿旦城의 위치Ⅳ. 阿旦城의 축조시기와 영유권 문제Ⅴ. 峨嵯山 고구려유적과 阿旦城Ⅵ. 맺는말

요약

본고에서는 고구려와 신라의 한강유역진출과 직결되는 문제인 아단성의 위치에 대해 관련 문헌기록과 고고학적인 연구성과를 토대로 검토하였다. 사료에 보이는 아단성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두 지역에 대한 동일한 명칭으로 파악하여 한강하류인 서울시 광진구 아차산에 있는 백제의 아단성과 남한강 상류인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고구려의 아단성으로 분리하여 살펴보았다.
「광개토왕릉비」의 396년의 아단성과 백제 책계왕이 蛇城과 함께 수리한 286년의 아단성, 그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侵寇로 인해 개로왕이 패사한 475년의 아단성은 백제에 의해 축성된 후 고구려에 점령당한 곳으로 현재의 아차산성이다. 『삼국사기』 온달전에 나오는 고구려의 아단성은 원래 고구려의 지배영역에 포함된 지역이었으나, 6세기 중엽 이후에 신라에게 빼앗긴 지역이었다.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지역인 鷄立峴과 죽령이서 지역, 즉 지금의 충주와 단양을 중심으로 하는 소백산맥 이북의 남한강 상류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아단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은 단양 영춘의 온달산성이었다.
각기 다른 두 개의 아단성이 존재했다는 것은 기존의 일반적 견해인 장수왕의 한성 공함작전 이후,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의 연합작전으로 백제가 한강하류 지역을 수복할 때까지 한강하류 지역이 고구려에 의해 점유되었다는 설에 재고를 요한다. 백제는 비록 웅진으로 천도하였지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개로왕의 아들인 문주왕도 한성에서 즉위한 후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그리고 웅진시대와 사비시대 백제의 대고구려 관련 기록들을 통해서도 한강유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는 계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장수왕의 한성 陷落은 일시적인 것으로 영속적인 영유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한강하류 지역의 고구려유적들이 모두 단기적으로 사용된 군사유적이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아단성은 최소한 4세기 말 광개토왕의 남정 이후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지만 6세기 중엽 이후에는 신라로 지배권이 넘어갔다. 지금까지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백제와 고구려의 아단성을 하나로 이해한 결과, 한강하류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가 장수왕의 백제 정벌 이후 나제동맹군에 의해 한강유역을 백제와 신라가 점령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계속 해 온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삼국사기』의 관련기록에 대한 무시 내지는 지명이동으로 간단히 인식한 결과였다. 사료에 대한 세심한 고찰과 판단이 요구된다 하겠다. (필자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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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처신라사학회 
    • 저자김영관 
    • 발간년도 
    • 게제지신라사학보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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