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국의 왕인박사가 일본 大阪으로 향할 때 대마의 鰐浦港에 기착하였을 것이라는 小考의 논증을 위하여 서두에서 대판지역의 왕인박사사적을 살펴보며 왕인박사 관계내용이 분명함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九州 佐賀縣 神埼町의 왕인박사 사적도 분명하여 大阪으로 향하던 중 기착지로 意義있는 諸遺蹟들이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의 이해를 바탕을 하여 首題인 왕인박사의 대마 鰐浦 기착 문제를 고찰하였는바 鰐浦의 역사를 살피고 이곳의 자연적조건을 다각도로 고려하며 연결시켜 종합적인 결과를 도출하여 결론을 맺었다.
즉 鰐浦의 역사에 있어서 이곳은 일찍부터 개항되어 한반도로 향하는 據點이었으며 특히 3세기 초반에는 大據點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때는 이곳을 和珥津(와니쓰)라 하여 和珥(와니)라는 지명이 중앙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여기의 和珥는 왕인(和珥, 和爾, 和邇 등의 칭호)의 발음에서 일어의 호칭인바 왕인박사의 도래기착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和珥(津)」라는 포구명이 생겼다는 것이 당연한 논리가 아닌가 한다.
다음으로 鰐浦의 자연적 위치, 즉 諸與件에 있어서는 한반도에서 제일 가까운 지리적 위치, 왕래 소요시간이 가장 짧은 위치, 해류에 있어 조류, 계절풍 등 여러상황에 따른 항로의 향방을 살펴볼 때 일본열도로 친출할 때는 반드시 대마북단의 鰐浦를 경유, 기착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자여적이고 필연적임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모든 사실과 상황을 살펴 보았을 때 鰐浦는 「和珥津」가 본래의 포구명이며 백제국의 왕인박사가 기착 駐在함으로써 和珥(王仁→와니)津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붙여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왕인박사는 한국의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상대포항구를 떠나 남해안을 거쳐 일본대마의 최북단인 지금의 鰐浦에 기착 주재함으로써 「和珥津」이라는 포구명을 남겼다. 이후 일본 구주의 좌하현 신기정에 기착 주재하였으며 이로써 목적지인 대판으로 향하였던 왕인박사의 도래경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