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현에 관련된 지명은 전국에 다수 산재하나 특히 백제 수도가 있던 충남지역에는 더욱 밀집되어 있다. 본고는 탄현의 위치를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의 숯고개로 보았다. 첫째, 성충과 흥수가 말한 炭峴과 沈峴은 백제 있어서 중요한 통로라고 말하였을 뿐, 탄현에 어떤 산성 등의 시설물이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단지 제라양국 사이에 중요 통로임을 지적한 것이다. 진산이 있는 지점은 금산과 마전에서 들어와 연산 황산벌로 통하는 삼각지대에 위치해 그야말로 요로임에 틀림 없다.
둘째, 백제 흥망 당시 제라 국경선은 이천에 있는 남천정에서 청주의 상당산성, 보은의 삼년산성, 상주 백화산의 금돌성으로 연결되는 후방 기지와 옥천의 관산성, 영동, 양산의 조천성, 합천의 대야성으로 연결되는 최전방이 양국 국경지대로 접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 3지역은 백제와 가장 치열하게 접전하던 곳이며 양쪽에서 동원된 병력은 백제 요로에 해당되는 진산 탄현에서 합류한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탄현을 넘어선 김유신장군이 이끄는 신라 5만 군대는 백제 계백장군이 삼영을 설치함을 알고 삼도로 나누어 진군하였다. 이 때 탄현을 넘어선 신라군이 도산리와 검천리에 이르러 중군은 곰치재로, 좌군은 월성봉의 백제산성을 정복하고, 우군은 황룡재에 있는 황령산성을 공격하였다.
넷째, 대전 동쪽 식장산 아래 자모실고개를 신라 5만 군대가 넘었으리라하는 설의 허구성이다. 삼년산성이나 백화산성에 근거를 둔 신라군이 우회해서 대전 동쪽 탄현을 선택했을리 없다. 진산 탄현을 지나 연산의 황산벌로 진출하는 통로를 택했으리라 본다.
다섯째, 고산 탄현설에 대한 불합리성이다. 이곳도 탄현이란 지명과 백제산성, 제라간 요로에 해당된다. 그러나 남하해서 우회해서 연산 황산벌까지 120리의 먼 길을 택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진산의 탄현은 60~70리의 최단거리다. 특히 신라 5만 군대 근거지인 금돌성이 상주 백화산성으로 가정될 경우, 가까운 통로는 영동, 금산, 진산, 연산 통로이며 이 중간 지점에 탄현이 위치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근거지인 보은 삼년산성과도 연결되는 곳이 바로 진산의 탄현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