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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서 예문화권의 설정과 역사지리적 배경(嶺西 濊文化圈의 設定과 歷史地理的 背景)

  • 분류 기타 >
  • 권호수 제30집
  • 저자 문안식
  • 발행일 1996년 12월
  • 게재지 동국사학
  • 발행처 동국사학회

목차


I. 머리말
II. 공간적 범위와 소위 위말갈과의 연관성
III. 백제의 범부여세력권 통합
IV. 고구려의 영서예 장악
V. 신라의 진출과 영서예문화권의 해체
VI. 맺음말

요약

嶺西濊의 空間的 範圍와 6세기에 이르도록 舊來의 在地聯盟體秩序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첫째, 영서예의 공간적 범위는 지리학적인 구분에 의하면 남․북한강유역과 태백고원 지대라 할 수 있는데, 이 지역은 高句麗系 無基壇式 積石塚의 散布地와 대략 일치하며 《三國史記》초기기록에 보이는 말갈관계 기사와 결합하여 嶺西濊文化圈이라 잠정적으로 명명할 수 있었다. 둘째, 中國郡縣의 축출과 백제의 성장에 따라 영서예지역은 백제의 영향력하에 편입되었다. 이 지역에 백제토기의 분포양상에 의하면 북한강유역의 所調 貊國은 재래의 연맹체질서가 거의 해체되지 않고 온존되었으며, 백제의 통치는 그들의 수장층을 통한 간접지배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남한강유역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백제토기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셋째, 고구려의 남진경략이 본격화되면서 영서예에 대한 영향력은 백제에서 고구려로 이전되었다. 장수왕의 평양천도에 이은 남하정책으로 인하여 영서예지역은 고구려의 군현이 설치되고 濊兵이 백제침입의 첨병으로 동원되는 등 고구려에 강하게 귀속되기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지배정책은 군현의 설치에도 불구하고 영서예의 재지적기반을 유지케 하면서 수장층을 고구려의 官等體系에 편입하여 官職을 除授하는 간접지배의 형식으로, 內地의 지방통치와는 달리 朝貢을 매개로 하는 이원적 지배구조의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신라는 이러한 고구려의 이원적 지배구조의 약점을 이용하여 비교적 용이하게 한강 상류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신라의 한강유역으로의 진출과 영서예지역에 대한 지배정책은 재지연맹체를 이용하는 이원적인 지방통치와는 양상을 달리하여 地方官의 파견과 內地化를 추진하는 등 일원적인 지배구조를 지향하였다. 따라서 영서예의 구래의 질서는 해체되고 신라의 일원적인 지방통치망에 편입된 결과, 이 지역의 거주민은 州兵의 형식으로 신라의 國民兵化되었다. 이러한 지방통치책은 성공하여 신라의 麗․濟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 북한강유역이 고구려에 재점령되어 영서예의 분리가 촉진되기도 하였지만 남한강유역의 확보와 한강수로의 유지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원동력으로 되었다. (필자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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