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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

백제의 부여 인식

  • 분류 문헌 > 기타
  • 권호수 제41집
  • 저자 배재영
  • 발행일 2009년 8월
  • 게재지 백제문화
  • 발행처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목차

I. 머리말
II. 왕실의 족원 관념으로서의 부여
III. 국제적 연대 대상으로서의 부여
IV. 국가 정통의 지향으로서의 부여
V. 맺음말

요약

백제의 시조 전승에 따르면 백제인들은 부여에서 출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출원인식은 백제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전 시기에 걸쳐 유지되었고, 왕실은 '扶餘氏'라는 단일한 왕통으로 계승되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백제사에 등장하는 부여에 대해 주로 '왕실의 출원 지역'을 의미한다는 제한된 설명이 주지되었다. 그리하여 이 논문은 백제의 부여 인식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목표로 하였다. 여기에는 백제사 전반에 걸쳐 확인되는 부여 인식에 관한 편린들이 검토될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의 부여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백제사의 중요한 시점들이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을 전제할 때, 백제의 부여 인식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부여는 백제 왕실 및 지배계층들의 출원 지역이다. 백제 왕실은 부여의 전통적인 제례 의식을 주관함으로써 부여계 지배층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부여는 백제 왕실의 출원 지역이자 왕실의 정통성이 발원한 곳으로 상징되었다.
둘째, 부여는 백제, 고구려와 함께 동일한 시공간에 존재한 나라였다. 고구려 역시 백제와 같은 부여로부터의 출계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백제와 부여는 고구려의 공세적인 대외 정책에 노출되어 있었다. 고구려와의 관계 속에서 백제와 부여의 입지는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5세기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를 고립시키기 위한 전 방위 공조 체제를 모색했다. 이때 고구려 서북 지역의 부여 역시 개로왕의 외교 대상국에 포함되었다. 백제는 고구려를 둘러싼 고립정책을 추진하면서 요서지역의 부여계인들을 현실적인 동반자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셋째,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백제는 웅진 천도를 감행해야 했다. 웅진 시대 고구려로부터의 자위와 자신감의 회복은 백제인들에게 무엇보다 큰 열망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대 고구려 정책이 추진되었으며, 사비천도가 준비되었다. 무령왕과 성왕은 전 왕대 보다 한층 적극적인 대 고구려 정책을 추진하였다. 대 고구려 정책에서의 성과는 백제 왕실의 위상을 고양시켰다. 이러한 자신감 속에 무령왕계 왕실은 백제사의 중흥기를 예비하게 된 것이다. 성왕은 사비로의 천도와 함께 백제의 새 시대 '남부여 시대'를 천명했다. 이제 부여는 왕실의 출원 지역이라는 관념상의 출계지역에서 사비 시대 백제가 지향해가야 할 국가적인 정통성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백제의 부여 인식은 백제사의 주요한 흐름 속에 형성되었고 변화해 갔다. 그리고 백제인들이 사유했던 부여에 관한 인식에는 이러한 시대적 고민과 염원이 담겨 있었다. (필자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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